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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역사1 / 호주의 탄생

Celina_kang 2019. 9. 25. 13:21


호주의 역사1 /호주의 탄생






호주를 역사의 시작하기 앞서, 호주는 지구상 에보리진or어보리진(호주 원주민)이 가장 오랫동안 살고 지속되어온 문화이다. 약 6만전 년이라고 추정된다. 최소 50,000년전에 도착한것으로 보인다.유럽사람이 도착하기전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아갔고 100만명이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언어는 700가지를 사용했다.17세기 유럽인들이 호주를 발견하고 훗날 지금까지 호주의 탄생의 역사의 기초가 되었다.청정지역으로 유명하며 자연식품 건강식품으로 많이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찾고 있다. 호주는 미국만큼에 큰영토를 이루고 있으며 각 주마다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다.




Advance Australia Fair

고대 유럽에서 남쪽에 존재하는 "테라 아우스트랄리스 라틴어에 근원이 된 : 오늘날의 오스트텔리아 Australia 이다."


수도  캔버라

인구 영국계 75%, 아일랜드 11%, 화교 5.6%. 독일계 4.5% 이탈라이계 원주민 인도인

공용어 사실상 공용어는 없으나 영어로 쓰인다.

종교  로마카톨릭교 22% 성공회 13% 개신교 16% 이밖에 불교 이슬람 힌두교 

국왕 엘리자베스 2세 (독립은 하였으나 영국 산하에 있다)

총독  스콧 모리슨

정부 영연방 왕국, 입헌구군제, 의원내각제








17세기 호주는 NEW HOLLAND라고 칭했다. 최초 발견한것은 네덜란드 탐험가 빌렘 얀스존이다. 그 이후에 동인도회사 부름을 받은 또다른 탐험가 아벨타스만은 호주의 또다른 대륙을 발견한다. 지금 호주의 섬 타즈메니아다. 이후 네덜란드가 호주에 관심이 멀어질떄쯤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 "인데버"호가 호주 동부에 정착하면서 호주의 변화가 일어난다. 호주 대륙을 발견때 쯤 영국과 북미 식민지인들과 전쟁으로 많은 혼란을 격고 있으며 또한 산업혁명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사회의 범죄가 빈번하며 죄수들을 수용할 교도소는 부족해졌다.영국의 정치인들은 호주를 하나의 범죄 수용소 사용하기 시작했다. 1778년 아서필립선장이 이끄는 배11척 1500명의  죄수가 시드라 하버에 도착했으며, 그 이름을 뉴사우스웨일즈라고 명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백인들의 역사가 시작된 시점이다. 이를 기념하는 날 호주 국경일 1월26일이 탄생했다. 그리고1868년 범죄자 수송이 완료될때쯤에는 160,000명이 이르렀다.


19세기초 영국의 항해사 매튜플린더스는 호주가 거대 대륙이라는 것을 알게된다.농업과 축업사업으로 경제의 가치가 올라가고 있었으며 호주대륙에 이주한 영국인들 정착지가 점차 확정되면서 원주민과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났다. 대부분은 영국인들이 승리했으며 영국의 경제적 가치 개발을 인정하므로 유배지에서 식민지로 전환했다. 이후 극격히 원주민들의 인구는 90%로 감소했다. 각종 빈번한 충돌과 전염병등 여러요인이 존재했다.


1851년 호주 남부에서는 금광이 발견됐다.골드러시가 시작됐다. 세계각지에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그로 이후 경제,산업이 크게 성장했다 .노동시장이 활발해짐에 따라 멜버른 각 지역에서 높은세금과 관세에 광부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1855년 호주대륙 식민지헌벙를 제정하고 자치정부 수립을 허락했다.이후 자취권을 부여받은 호주식민지의 각 주들은 외교권, 군사권을 제외한 모든일을 할수 있게 됐다.골든러쉬로 많은 사람들을 호주로 올당시 중국인들도 많이 호주로 이주했다.이로인해 임금경쟁이 발생하고 호주에 사는 백인 영국인들은 동양인 이민을 제한하기 시작한다.그리고 이때부터 백호주의가 시작된다 (모든 유색인종 배척. 백인들만 사회를 유지:영국인,아일랜드계).

무역과 관세, 교통무역 등 통합이 필요해지자 헨리파크스 총리는 호주연방 헌법을 제정한다.이에 빅토리아여왕은 승인하고 각 6개의 주 웨스턴,사우스,퀸스랜드, 뉴사우스웰스,빅토리아가 호주연방으로 탄생하다.1901년 사실상 독립을 하게된다.


안작데이(기념데이)

1914 1차세계대전 유럽제국주의 열강들이 충돌하여 영국군은 호주와 뉴질랜드 남자들만 징집하여  중동의 오스만 제국군과 사투를 벌린다(갈리폴리 전투) 500만원 인구에서 30만의 넘는 사람들을 전쟁터에 내보내졌다. 왠만한 호주 가정에 조상이 갈리폴리에서 전사한 사람들이 몇있다고 한다.


1939년 2차세계대전으로 호주는 미국과 연맹하여 일본과 싸우게된다.미국과 연맹으로 이를 승리한 이후 공동 방위조약을 맺는다(1951년).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무력에 다른 아시아 난민들은 많은 힘이 되었다. 호주는 그들에게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다시 돌가는 목적으로 그들을 수용했다. 6천명의 중국난민들은 호주를 떠나기로 약속했으나, 500명정도는 호주에 살기 원했다. 하지만 백호주위를 우선시하는데 이때 노동당 대표였던 극 백호주의 아서칼웰은 이를 저지한다. 백호주의가 폐지되게된 배경으로 1949년 오키프사건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이주해온 애니라는 여성은 2차세계대전에 온가족이 대거 이주했다. 하지만 남편이 죽고 호주남성과 결혼함으로 그곳에 시민으로 살기원했으나. 아서컬웰은 이를 개입하는 사건이다. 보수주의이였던 그는 사람들이 백호주의를 선호한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호주사람들은 애니의 가정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가 개입함으로 이것을 위장결혼이라고 칭했다. 논란이되고 대법원까지 가게 되는데, 대법원에서 호주국민으로 승인되고 호주국민으로 애니는 받아들여지는 사건이였다.


그리고 마침내 1973년 백호주의 페지가 된다.이에 배경은 인종차별적 백호주의가 비난을 받고 아시아국과외 외교과 어려워지면서 호주의 노동당은 미래를 위한 다문화 사회라는 보고서를 발표함으로 공식적으로 철폐했다.